영조 & 정조 조선 후기 18세기 (1724-1800)
조선 후기, 불꽃이 새롭게 살아나던 시기
이때만 해도 조선의 미래는 기대해볼만 하다고 함...
순 & 헌 & 철 조선 후기 19세기 전반 (1800-1863)
하지만.. 영정조를 이은 순헌철종은 전혀 왕 노릇을 못하고...
조정은 세도가문의 손아귀에서 철저히 놀아났다...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시기를 가장 한심하게 보낸 나라였을 각...)
그 와중에도 일반 백성들은 알아서 잘 커나가고 있었음
상업도 기술도 의식도 올라가는데 사회구조가 변화를 못받쳐줌..
그때 19세기 전반 주변국의 상황은???
당시 중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을 치루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 개항 이후 메이지 유신을 준비중이었다..!!
이때 우리나라 조정은 매우매우 속터지는짓거리만 함...
불행 중 다행인지,,
세도정치의 허수아비 왕이던 철종은 아들이 없었..!
그래서 가장 만만하고 컨트롤하기 좋은 왕족 중에서 원픽이었다고 함..
자 여기서 흥선대원군이 나옴.
그의 아들이 고종!!
워낙 격동의 시기였기에 평가는 갈릴 수 밖에 없지만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진짜 조선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정책을 세우긴 했음.
정권 초기, 기존의 세도가들을 다 쳐내는 작업에도 성공함.
그러나 그는.....
전국팔도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외세에
배타적이고 또 단호박이 심했음...
분명 역사에는 이런인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시대를 좀 잘 못만난...
너무나 단호박이던 그....
그가 좀만 유유부단하고 개방적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봄..
암튼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프랑스와 미국 등
몇 차례의 접촉이 있었으나 항상 최악의 결과로
끝이 났다........
그결과로 당연히 조선의 조정은 더욱 더 문을 꼭꼭 닫기에 이르른다..
흥선대원군 섭정당시 주변국은??
청은 아편전쟁으로 깨진 뒤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을 진행 중이었고
일본은 정신과 기술 모두를 바꾸자며
메이저유신에 본격 착수했음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걸 다시 한번 뼈져리게 느낄수있다...
결국 주변국이 강제 오프닝으로 난리일때
귀틀막 하면서 국제정사는 외면하던 대가는..
1876년 하필 일본을 통해 호되게 받게 됨.
일본은 자기들이 미국에게 당했던 포함외교를
우리에게 복붙하여 활용하였고
..그렇게 조선 정부도 1876년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게 된다..
역사공부 안한 사람도 들어봤다던..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참.. 지나고 나면 모든게 결과론이니까
욕하는게 당연하기도 하고 뭐 그렇치만..
그 격변의 시기에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있던 지식인로서는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지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자 암튼 이런 상황에
급진 개화파 대표 지식인 4인방이 등장하는데...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받아들여야 할 문물은 쏟아지는데
조정에선 거르고 걸러
기껏해야 무기 수준에서나
외국 기술을 수용 중이었음...
76년 개화 이후 벌써 9년..
메이저유신으로 급변하는 일본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이들로서는
정부의 이러한 태도가 당연히 갑갑할수 밖에 없음 당연히.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곱히던 이들은
이대로는 조선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거사를 치루어 조선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다.
3일천하로 끝난 ..
갑신정변(1884)
그들이 추구하려던 변화는 너무나 급진적이었고
그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는 이들은 적었으며
개혁의 베이스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갑신정변은 정말 하루 밤의 꿈으로 끝나긴 했지만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고 노렸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인건 사실임.
그렇게 갑신정변이후
10년동안은 큰 사건은 없었다.
(큰 사건만 없었지 보여지지 않는 곪아있는 문제들이 더 많았음)
76년 개항 이후 거진 20년이란 시간 동안
조선 백성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
오히려 기존 조정의 수탈에 더해
일본과 청의 쌀 수탈과 상업침해로 더욱 악화됨.
무엇이 문제인지 집어 말할수없을 정도로
신분 경제 사회 외세 모든~문제가 복잡하게 뒤엉켜있음.
1894년 ..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는데..
그 시작은 농민군이었음.
동학은 농민운동의 구심정이었음.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볼집회가
하나의 구심점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여든 것처럼
동학도 그러한 역할을 했음
동학농민운동은 단순 종교집단의 반발로 보면 안됌..!
개항 이전 세도 정치 하에서의 고통과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받은 고통을
한꺼번에 표출하게 된 민중 혁명이었음..
민중의 요구는 그저 사람답게, 인간답게 사는것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들은
민중이 인간답게 살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음.
신분철폐, 토지개혁, 조세개혁..
동학 농민군의 요구는 그들 입장에서
무엇 하나 포기하기 힘든 것.
때문에.. 처음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땐
dog놀래서 이걸 잠재우기에 급급했음.
이에 정부는...ㅉ
동학 농민군을 잡겠다며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함.
근데 10년 전에 3일천하 갑신정변보면
그 당시 갑신정변을 정리하면서, 청과 일본은 약속을 함.
(우리 둘다 조선에서 군대 빼고 한발 빠져있자고)
근데 그로부터 10년만에
무려 조선 조정의 정식 요청으로 인해 ( 에휴 에휴 에휴)
청나라의 군대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거임.
그래서 일어난게 청일전쟁
청일전쟁의 승기는 일본이 잡게 된다.
자 이제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의 내정간섭에 앞서
제도 개혁에 착수한다.
그것이 바로 갑.오.개.혁
(낡은 제도를 청산한다 - 신분제 폐지, 재혼과는 과부, 과거제 폐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바람이 이루어졌다는데서
분명 갑오개혁은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떵싸고 떵 안닦고 나온 것처럼 찜ㅈ찜한 이유는
그 배경에 일본, 외세의 숨은 의도가 있기 때문)
청일 전쟁부터 갑오개혁까지
이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동학농민군들이었음..
(외국군대 들어오라고 일으킨 난이 아닌데.. 어이가 털리고..)
처음 동학농민군들의 요구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지만
그건 외세한테 바란 것이 아니었음
청일 전쟁, 갑오개혁을 지켜보며
동학농민군들은 일본아웃을 외쳤고
다시 한번 재봉기 하였음.
하지만 실패함....
(녹두장군이란 별명으로 더 익숙한 전봉준은 이때 잡힘
그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계몽시켜 준 좋은 사람이었음...)
자 정리
1. 첫 동학 농민 봉기
2.동학농민군 잡으러 청군 sos쳤다가 청일전쟁 발발
3.청일전쟁 승리각인 일본이 갑오개혁
4.여기에 혈압오른 동학농민군 재봉기 그러나 패배...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
조선으로선 소용돌이의 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승전 대가로 청에게 요동반도를 얻어냄
그렇게 좋은 땅을 일본한테 주는게 배가 아픈나라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러시아.
러시아는 부동항 즉 얼지않는 항구를 항상 꿈꾸고 있었음.
요동반도는 바로 그 베스트포인트 중 하난데
갑툭튀 일본이 가져가니 배가 너무나 아픈것...
그래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불러
셋은 일본한테 달려가서 말함
(너 거기 있으면 조선이 애매하잖아 그러니까 꺼져)
웃긴게 조선 핑계를 대는거 자체가 어이털림
그냥 배가 아픈거면서.. 둘러대기 선수..
암튼 이렇게 셋이 양아치 짓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못 가지게 한 것이 바로 ..!
삼국간섭
일본은 황당한 오지랖에 어이가 없지만
일본은 미국한테 강제 오프닝(개항)을 당한터라
서양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좀 그른게 있었음..
괜히 오기 부렸다 또 당할수있으니
결국 알았다고 땅 다시 청한테 돌려준다고 함..
그 이후 ..
일본은 요동반도를 논앞에서 뺏기며
굴욕을 맛보았고 그야말로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는데..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다.
그 대단한 청나라도 이긴 일본이 러시아에는 쩔쩔 맨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대응 방안으로
러시아와 손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 모습이 일본눈에는 아주 그냥 밉상으로 보일고 거슬림)
을미사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 작전명(여우사냥이라고 했었음.)
명성황후는 우리 역사에서 멋진 인물은 아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은 맞음.
근데 일본이 저지른
왕비 시해는 세계 역사상으로도 없는 역대급 행패임.
팁 : 만약에 외국인이 일본을 왜 싫어하냐고 물어볼경우
외국인 왈 : 왜 일본에 그렇게 적대적이야??
한국인 왈 : 일본은 우리 왕비를 여우사냥이라고 조롱하며 살해했어
외국인 왈 : 아 언더스텐드 완전 나쁘네~~ .. 충격
이 한마디면 그냥 모두가 깔끔하게 인정함.
굳이 구구절절 식민지 이야기로 열내는 것보다 명성황후 스토리
하나면 끝남 그냥.
(오늘날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 대부분이 그 시절
식민지 지배국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음...)
암튼.. 왕비가 경복궁 처소에서 살해 당한 이후..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다..= 아관파천!!
커피를 사발로 마셨다는 커피덕후 고종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영화 가비를 알거임)
고종이 부인이 살해 당한 충격과 공포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요양하고 있으니
러시아는 고종 목숨을 담보로 가진 것이나 마찮가지였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러시아는 그 대가로 조선 광물과 산림을 신~나게 털어감.
백성들 입장에서는
일본 꺼지니까 러시아가 들어온 격이니
고종 궁으로 복귀하란 말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음.
독렵협회의 만민공동회
독립신문으로 익숙한 독립협회
이들은 민중을 계몽시키고
또 민심을 한데 모아
조선 정부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애썼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파급효과는 상당했고
고종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멘탈을 좀 추스리게 됨..
아관파천으로 부터 1년이 지나고..
대한제국 설립.
고정은 개혁의지는 강했으나
제도가 너무나 시대를 역행했단 비판을 받음.
고종이 결국 의회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조선 500년 역사에 있어서
물러난 왕이 온전히 대접받은 적도 없으니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생각해 볼 만도 하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한제국 설집 직후
그 나름의 제도 개혁화 사회 변화,
그리고 조선의 자주성 확보를 위해서
애썼다는 측면에서 의의는 충분히 있음.
민비 혹은 민왕후가 명성황후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함.
명성황후는 민비가 대한제국 설립으로 사후에 붙여진 호칭
살아 생전엔 대한제국 설립 전이었으니 민비도 맞고
사후에 추존되었으니 명성황후도 맞음.
하지만 외세에겐 그러거나 말거나 였다는거..
1904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1905 일본이 승리한다.
자 삼국간섭의 굴욕으로부터
정확희 10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누구도 예상못한 일본의 압도적 승리였음.
일본은 전쟁 직후 곧바로 조선과의 늑약을 체결한다.
을사조약으로 더 익숙한 을사늑약
하지만 조약이라는 표현은 황제의 찬성 없이는 쓸 수 없고
을사늑약은 을사5적에 의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 주범 을사 5적
(학두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이 나라 팔아먹은 상놈들임.
이 이후로
1905 외교권 박탈
1907 고종 강제 양위 / 행정권 박탈 / 군사권 박탈
1909 사법권 박탈
1910 경찰권 박탈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 기세를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음.
그런 희생과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병합조약..= 한국 전부의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35년은 시작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
자 다시 역사 반복학습..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고조선
2.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3.삼국시대
4.통일신라&발해(남북극)
5.후삼국시대
6.고려 왕조 500년
7.조선 왕조 500년
8.개항기 & 개화기
이어서 일제강점기는..
그다음에.
'★독학하는_공부기록 > 한국사 쉽게 요약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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