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
국권피탈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도 들어섰다.
그와 더불어 헌병경찰통치의 시대였다.
헌병은 쉽게 군인 경찰을 의미하는데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 마냥 총칼을 차고서
헌병들이 일반 경찰처럼 평소 돌아다니는 거임.
일상생활에서 공포 분위기 조성은 물론이며
선생들도 총칼을 차고서 수업을 했음.
이 헌병 경찰들에게는
즉결심판권이 주어졌다.
즉결 심판권 =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즉시 처벌 할 수 있는 권리.
3.1운동 당시에도 이 즉결심판권으로 조선인들의 귀를 자르고
태형을 행했다.
1910년대의 경우 이렇듯
국내 경비가 워낙 삼엄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가 너무 힘들었음.
그래서 대부분 독립운동기지가 국외에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
우당 이회영도 전재산(약 600억)을 처분한 뒤
서간도로 가서 신흥 무관학교를 세웠음.
도산 안창호는 미국으로 가서 흥사단을 만들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다.
이 와중에 1910년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1914)
러일전쟁으로 기세 등등하던 일본도 연합군으로 껴서 승리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1918)
미국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고.
이는 3.1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됨.
민족자결주의 = 민족의 문제는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
민족자결주의라 쓰고 희망고문이라고 읽으면 된다.!
민족자결주의는 허울만 좋았지
실상은 패전국 신민지의 독립을 위함이었다.
패전국들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한 방안일 뿐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빅픽처를 알리가 없고..
어쨌든간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0년 간의 식민치하에서의 조선인에게 있어
분노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음.
1919년
고종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3.1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됨.!
3.1절의 만세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음.
마치 촛볼집회가 전세계 민주주의의 아이콘이 된것과 같은 의미임.
3.1운동은 또한 많은 이들의 희생을 낳기도 했음..
1920년대
3.1운동의 폭발적인 민족적 저항은 이후
일제 통치방식에 영향을 끼치게 됨.
문화통치 = 헌병경찰이 아닌 보통경찰 통치라고도 함.
이는 선망하는 서양국가대열에 끼고 싶어하는 일본의
보여주기 식의 통치 방법이었음.
1923년 관동(간토)대지진 대학살
자연 재해로 인한 일본 자국민의 원망을 돌리기 위해서
조선인 대학살을 자행하긴 했지만
"우린 식민통치를 대단히 합법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할까
애초에 식민통치를 합법적으로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긴 하지만...
(나쁜놈들이 명분은 또 그렇게 따짐)
암튼 문화통치의 다른 의미는
친일파 양성 프로젝트
존경받던 천재 문인이었던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설파한다 (이게 다 우리가 다 못난 탓이다!!라는 내용)
이렇듯 친일파가 힘을 얻던 20년 대 무정부주의자(아나카즘)인 의열단도 있었음.
"강력하고 일사 분란한 폭력투쟁을 벌여
일제에 타격을 줌으로써 독립을 이루자"
"끊임없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한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이 내용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강령 중 일부이다.
언뜻 과격해 보일 수도 있지만
비폭력 운동이었던 3.1 만세운동이
일본한테 씨알도 안 먹히는 걸 보고서 고안한 방안이니..
(일본은 말로 안 통한다는 걸 일찍이 아셨던 배우신 분들이었음.)
또한 1920년 대에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서
사회주의가 국내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신간회라는 좌/우익의 합작 단체를 탄생시켰음.
신간회 좌우합작의 의미는
사회주의가 아닌 우익이더라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다면
함께한다는 의미.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이념도 양보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체이기에 의미가 큼.
신간회는 29년 광주 학생운동을 서포트 해주기도 했으며
20년대 후반 국내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주었음.
1920년대
국외의 상황은
친일파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좌우합작
국내에서 이렇게 의견이 나뉘었던 것처럼
국외 또한 독립방안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우선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음.
(1919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임.)
대한민국임시정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많은 방법 중 외교론에 큰 힘을 싣는데
이로 인해서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외교론자인 이승만이
1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됨.
이승만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임정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아니었음.
이전부터 이미 이승만은 자기가 대통령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이 때문에 많은 욕을 먹고 있는 상태였음.
근데!! 때마침@! 민족 자결주의로 외교론이 힘을 얻은 것임
(역시 여기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수 있음)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을 탐탁찮게 생각했지만
권력다툼 할 때가 아니니
대승적 차원에서 자리를 내어 준것이다.
"장래 완전독립을 보증하시면
아직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 하에 두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이승만이 미국 윌슨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게됨.
국내든 국외든 조국 해방 모의에 있어서
20년대는 혼돈의 카오스 상태였음.
특히나 국외는 이승만 위임청원론이 불씨가 되어
더욱 뿔뿔히 흩어지는 계기가 된다.
3.1운동으로 그토록 어렵게 모임 임시정부였는데....
임시정부의 외로운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임...
구심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돈도.. 사람도 없이.. 김구는
임시정부를 혼자서 지켜나간다.
지금 당장은 이모양 꼬라지라도
언젠가 모두가 한 곳에 모이려면
임시정부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또한 임시정부만큼 정통성이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음..)
1929년..
그러던 중 경제대공항이 세계를 덮침
대공항의 타격을 맞은 건 일본도 마찬가지였음.
(그 전부터 이미 일본 내에선 금융위기가 터졌단게 더 정확할지도 모름..)
1930년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당시 일본은 전쟁을 선택하게 된다.
일본 입장에서야
(식민지 획득, 국내 여론 안정, 경제 성장)
원샷 올킬이 가능한 전쟁이 머리가 안아프니...
그렇게 만주사변은 발발한다(1931)
같은 시기 운영에 난항에 난항 껶던 임시정부의 김구는 타개책으로
한인애국단을 창설함.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과 윤봉길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이 주된 목적
이봉창은 도쿄 경시청에서
일본 천황을 폭탄으로 저격, 아쉽게 실패하였으나
윤봉길은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 명중에 성공하였다.
중국의 장제스는 이를 보고서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임시정부의 중국 내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게 대단한게 뭐냐면
지금도 중국에서는 독립하려는 소수민족이 많음.
근데, 우리 정부에서, 우리 한반도 땅에서
그 나라가 독립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적극 지원을 해준다는 소리임.
물론 시대적 상황이 지금과는 다르지만
그때 당시도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음.
이름만 그럴사한 정부라고
비웃음이나 사던 임시정부였는데,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
실질적인 임시정부으로 다시 거듭나게 된 거니까
훗날 2차 세계대전 종결 전 카이로 선언에서
수많은 식민지 중 유일하게 한국만이
독립국가를 약속 받아냄.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이 결정적으로 뽑힘.
1930년대
(그당시 국내 상황)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30년대의 경성(서울)임
사람들은 조금씩 식민지에 적응해가고
조국의 해방은 그저 꿈처럼 보이는 그런 시절.
경술국치 1910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어느새 20살 성인이 되어버릴 만큼 시간이 흘러버린 것
20년이란 시간은 식민치하에 익숙해지고 지쳐
독립을 포기하기에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30년대 독립군들이 더 대단한 이유이기도 함.
그 와중에 일본은
결국 중일전쟁을 시작한다(1937)
전쟁에 미친...
사실상의 세계 제 2차대전을 대기 중인 셈이다.
사실 일본은 자본과 여력이 넘쳐난 게 아니었음.
그냥 밀어붙인것.
(어차피 전쟁터는 자기네 땅도 아니고..
전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없는 돈 쥐어짜내는 건
식민지인 조선의 몫이었음)
조선은 중국침공의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되고
조선사람도 조선물건도 다 뺏긴다.
또한 전쟁 수단으로서 진정한 가치는
그 몫을 다해야 의미가 있으니
본격적으로 뼈속까지 일본인을 만들고자 한다.
바로 황국신민화 정책
(황국(일본)백성으로 만드는 정책)
황국신민학교를 뜻하는 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학생들은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며
창씨개명으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다.
이 모든것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다지기 위한 것이였다.
너무나도 당연히
진짜 일본인으로의 인정이 아닌
그저 전쟁물자를 저항없이
보다 원활히 공급받기 위함이었음.
1940년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전쟁광기는..
학도병.. 일본군 위안부.. 인체실험..
평범한 조선인들의 삶을 파괴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년 한인애국단의 활약으로 중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30년대 내내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독립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40년대 드디어!!
충칭에 자리한다.
그리고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김구
광복군 지청천
삼균주의 조소앙
조선의용대 김원봉
사실상의 독립군 어벤져스가 탄생하게 된다.
(원래 잘난 사람들을 한 팀에 모이기란 보통 쉬운일이 아니다..)
광복군을 구성하고
대일. 대독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합군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또한 1944년부터 미국군과 함께 국내정진군을 창설
45년 9월, 국내 진공작전을 수립한다.!
1945년
전쟁은 이미 끝물인데도
일본의 전쟁광기는 멈추지 않았음.
하다하다 카미카제가 등장한 것도 이쯤이다.
(카미카제라 쓰고 개죽음특공대라고 말한다.)
45년 7월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구너하지만
일본은 역시나 전쟁광기로 인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익히 알고 있는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이때
등장한다.
이후 3일 뒤에 나가사키에 한방 더 터트림
그리고 6일 뒤 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그렇게 찾아온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은
아니 예상치 못한 해방은
모든 조선인에게 기쁨은 아니었다.
일본 패망소식을 들은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광복군이 45년 9월 독립 전쟁을 준비 중이었고
자기 힘으로 독립하지 않은 식민지에게
닥쳐올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 광복은
그토록 원했던 해방된 조국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식민지 35년은 그렇게 끝났다..
다시 역사 반복.
1.고조선
2.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3.삼국시대
4.통일신라&발해(남북극)
5.후삼국시대
6.고려 왕조 500년
7.조선 왕조 500년
8. 개항기 & 개화기
9. 일제강점기
다음 미군정기(정부수립)은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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